하시모토 류타로
- ninami1981
- Sep 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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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테리아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郞, 1937. 1]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郞 교본룡태랑1937. 1] 요약 일본의 제84대 총리. 1995년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선출되어 이듬해 1월 제84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경제상황에 대한 판단착오, 소비세 인상에 따른 경기후퇴의 심각화, 항구적인 감세에 관한 과세 최저화의 발언이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여 1998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함으로써 총리직을 사직하였다. 하시모토 류타로 도쿄에서 출생하여 1960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을 졸업하고 후생대신 비서를 거쳐 1963년 중의원...
하시모토 갑상선염(Hashimoto's thyroiditis)이란?
1978년 후생상, 1986년 운수상, 1989년 간사장, 동년에 대장상, 1993년 하시모토 류타로, 1994년 통상산업성 등을 거치면서 파와 다케시타파의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1995년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꺾고 당선되었고 이듬해 1월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사임으로 총리에 당선되었다. 총리가 되고난 후 중의원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그로 인해 리더십을 얻어 개혁을 진행해 나가지만 1998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소비세 인상으로 인해 사실상 패배하면서 사임하였다. 임기는 2년 반 정도로 짧은 편은 아니었다. 업적도 그렇게 없지는 않았으며 후임은 로 다케시타파 총리의 맥을 이어가며 경기 회복에 성공했다. 모리 요시로의 사임 이후 2001년 총재선거에서도 출마하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밀려서 낙선됐다. 특히 지역 선거인단에서 망하고 이 결과에 동요한 의원들이 고이즈미를 찍은 탓이 컸다. 2004년, 검찰 수사를 받는 등의 행보를 보이다가 표적수사 2005년에는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하자 정계를 은퇴하고 그 해 사망한다. 이때 타케시타파의 대다수 의원들이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모리파 천하가 열리고 지금과 같이 호소다파 모리파의 새 이름 가 계속 집권하게 된다. 자민당이 야당일 때 총재였던 는 고치카이 소속이었으나 총리가 아니라서 예외. 아소 다로는 호소다파는 아니지만 호소다파의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되었고 그 자신은 군소 파벌인 하시모토 류타로 출신이었다. 하시모토 갑상선염
아버지 료고는 일개 맥주공장 효모기술자에서 대일본맥주 상무이사로 출세하여 가계를 일으킨 부자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다리가 불편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만, 의지만은 강하여 20대에 에 진학하였고 을 거쳐 대장성에 입성하였다. 료고는 첫 아내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오노 로쿠이치로의 딸 하루코를 맞아 1937년 장남 류타로가 태어났지만 하루코는 류타로 출생 5개월만에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이후 류타로가 7세이던 때 두 번째 아내로 정치가 와카미야 사다오의 딸 마사를 들여 1947년 차남 다이지로가 태어났다. 나이 이 10살이 났다. 류타로는 초등학교를 거쳐 명문 인 아자부 중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중학 시절 성적이 최하위였기에 정치가 아들이 뒷문으로 들어온 거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아자부 고등학교 시절엔 산악부에서 활동하였고 성적이 중간 정도로 올라왔으며, 1956년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검도에 매진했으며, 1960년 대학을 졸업하고 쿠레하 방적에 입사한다. 사회인 3년차인 1962년 아버지 료고가 급사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의중에 두던 후계자는 동생 다이지로였고 류타로 역시 정계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허나 당시 동생은 고등학생이었고, 결국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의 지명으로 후계자가 된다. 이후 정계 입문 준비를 위해 후생대신의 비서로 근무하며 후생성 출입기자들이 감탄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다. 그와 후생성의 연관이 깊은데 평생 장애로 다리를 절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후생족의원이 되었을 정도이다. 제30회 중의원 총선거에 부친 하시모토... 아카이브조선 소사
아베 총리가 지난해 도쿄의 야스쿠니 靖國 신사를 참배 당시 모습. 하지만 미키 총리는 자신의 참배가 '사적 참배'라며 공용차를 쓰지 않고 신사 참배할 때 등에 봉납하는 공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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